“나, 직장 생활도 프로야” 신제품 평가·시장조사 나서
사장이 한 회사의 최고경영자(CEO)라면, 주부는 한 가정의 CEO다.
이제는 기업들도 프로 주부를 전문가로 인정해주는 시대다.
CJ는 최근 5명의 계약직 직원을 채용하면서, 결혼 7~10년차에, 직장 경험이 없고,
자녀가 있어야 한다는 ‘자격 요건’을 내걸었다. 이 정도가 되어야만 소비자들의 생활 패턴과
취향을 읽어내고, 기업에 조언을 해줄 만한 주부로서의 경험이 ‘축적’돼 있다고 본 것이다.
24대1의 경쟁률을 뚫고 선발된 5명의 전업주부 출신 마케터들이
이달 초부터 CJ 마케팅전략팀에서 근무하고 있다. 장은아(39), 차경옥(41), 문혜영(31),
안상희(35), 원유숙(40)씨가 그 주인공.
지난 15일 오전 서울 중림동의 CJ 마케팅본부 사무실. 커다란 테이블 위에는 300g짜리
‘햇반’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회의 주제는 햇반 용기를 어떻게 바꿀까 하는 것.
“아니, 큰 햇반을 만든다면서 언뜻 보면 용기 크기는 별로 차이가 없잖아.
과연 주부들이 큰 햇반과 작은 햇반의 차이를 알까?” “300g은 한 끼 식사로 많지 않아?”….
회의 내용은 심각했지만, 간간이 웃음소리도 들렸다. 직장에 출근했다고는 하지만, 한 아파트에 사는 주부들끼리 모여 수다 떠는 분위기다.
안상희씨는 “‘이 제품은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 하면서 우리끼리 주고받는 평범한 이야기들이
아이디어로 발전되고, 다시 제품을 개선하는 데 반영된다는 것이 새롭고 재미있다”고 말했다.
5명의 주부 마케터들은 지난 1주일 새 MS워드와 엑셀, 파워포인트 등 업무용 소프트웨어
이용법을 모두 배울 정도로 업무에 열성적이다.
지난 14일엔 할인점 두 곳과 백화점을 돌아다니며 ‘기억에 남는 사은품은 무엇이었나’
‘특정 제품의 가격이 싸게 팔리는 것이 과연 좋은 것일까’ ‘경쟁사 제품과 비교해
가격대는 합리적인가’ 등을 조사해 간략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김태호 과장은 “일반 주부 모니터들이 조사한 것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깊이가 있어,
신제품 개발과 기획에 활용할 만한 점이 많다”고 말했다.
이들은 신제품을 개발하는 브랜드매니저(BM)들에게 거침없이 ‘쓰디쓴 충고’도 해준다.
간혹 얼굴을 붉힌 채 회의실을 나서는 브랜드매니저들도 볼 수 있다.
지난주 이들의 사무실에는 가공식품을 담당하는 남자 직원 한 명이 찾아왔다.
“심혈을 기울여 개발한 제품인데, 왜 이렇게 소비자 반응이 안 좋은지 모르겠다”고
조언을 구하자, 주부 마케터들은 “맛이 없어 안 팔린다. 처음 한두 번은 몰라도 네댓 번은
못 먹는다. 주부가 가족들 먹을 음식을 식탁에 올릴 때는 여러 번 먹어도 질리지 않는
음식을 고른다”고 충고를 해줬다. 안용희 마케팅전략팀 과장은 “주부들이 ‘전문가’로
소문이 나면서, 브랜드매니저들 사이에 ‘면담 신청’이 줄을 잇고 있다”고 귀띔했다.
CJ가 1년 계약을 하고 이들을 직원으로 채용한 이유는 단순히 상품에 대한 소비자 반응을
살피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서다. 김진수 부사장은 “제조업체가 신상품을
내놓고 나중에 소비자가 이를 검증하는 것이 아니라, 기획단계부터 소비자가 아이디어를
내는 ‘프로슈머’ 마케팅의 일환”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들은 ‘전문 주부’로서 제품에 대해 조언하고 시장 조사를 하면서, 신제품 아이디어
개발에도 참여할 예정이다. 기존의 마케터와는 다른 시각을 가진 ‘새로운 피’로 수혈된 셈이다.
이들은 또 단순히 주부 경력만 갖고 뽑힌 건 아니다. 인지·문제해결·커뮤니케이션능력
테스트 등 대졸 신입사원들과 똑같은 전형절차를 밟았다. 문혜영씨는 “1시간 넘게 면접을
하면서, 면접관 2명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에 혼쭐이 났다”고 말했다. ‘반장님’으로
통하는 원유숙씨는 독일 뮌스터대학에서 경영대학원을 수료한 실력파다.
회사 입장에서는 이 주부 마케터들이 어느 순간 기존 직원들처럼 기업의 사고방식에
오염(?)되는 걸 가장 우려한다. 장은아씨는 “회의 도중 나도 모르게 ‘우리 회사’ ‘우리 제품’
이라는 표현이 입 밖으로 나와 깜짝깜짝 놀라지만, 제품을 볼 때는 철저히 주부이자
소비자의 시각을 유지한다”고 말했다.
10여년의 공백기를 거쳐 사회에 새로 발걸음을 내딛는 주부 마케터들의 포부도 남달랐다.
차경옥씨는 “아줌마들은 쉽사리 푹 ‘퍼진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신문과 책·인터넷을 통해
끊임없이 정보를 흡수하고 나 자신을 계발해 나가겠다”고 했다. 원유숙씨는 “출근하려고
지하철을 타는 순간부터 세상이 새롭게 보인다”면서 “집안 살림을 똑 부러지게 하는 주부는
어떤 일을 맡아도 다 잘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야무지게 말했다.
[2003/04/24/ 조선닷컴 (申東昕기자
dhshin@chosun.com )]
[홈이코노미] CJ 주부마케터 5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