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를 다지자] 경솔한 소비자의식
중앙일보에서 새해 특집으로 진행하는 [기초를다지자]에 소비자의식에 대한 글입니다
몇년전 국내에서 고객서비스를 맡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한 여성고객이 A/S(애프터 서비스) 센터에 잔뜩 성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 왔다.
얼마전 장만한 오디오가 돌연 작동하지 않는다고 항의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기본 점검 사항을 알려주려 했다.
하지만 그 고객은 빨리 와서 고쳐내라며 전화번호와 주소만 얘기하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우리 회사 직원이 A/S 장비를 차에 가득 싣고 현장에 나갔다.
그런데 점검결과 전원 코드가 빠져 있을 뿐 오디오엔 아무 이상도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런 일은 요즘에도 잦다. TV화면이 이상하다고 해서 가보면 안테나 잭이 빠져 있고, 세탁기가 돌아가지 않는다고 해서 출동하면 작동버튼을 잘못 눌러 문제가 일어난 것으로 판명된다.
꽤 오래전 일본에 파견돼 일할 땐 색다른 경험을 했다.
월세로 구한 집 주인은 낡은 에어컨의 사용설명서를 챙겨주며 "에어컨이 10년 넘은 것이지만
사용설명서만 잘 보면 쓸 만할 것" 이라고 말했다.
일본 소비자에겐 이런 일이 기본이다.
사용설명서를 꼼꼼히 읽는 사람이 많고, AS 신청도 매우 신중하게 한다.
반면 국내에선 소비자들의 그릇된 인식으로 AS가 남발되고 있다. 약간만 신경써 사용설명서를 읽어 보면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는데도 AS를 신청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사용설명서도, AS도 결코 공짜가 아니다. 고스란히 제품값에 반영된다.
지난해 TV.냉장고.세탁기 등 주요 가전제품은 1천76만대 팔린 것으로 추산된다.
사용설명서 1부당 제작원가가 3천원꼴이니 가전제품의 사용설명서를 만드는 데만도
3백30억원이 든 셈이다.
고장이 나지 않았는데도 AS상담을 한 데 따른 비용은 연간 약 1백억원에 달한다.
인건비.통화료 등을 포함해 한 통화당 1천원 정도 들기 때문이다.
우리 회사엔 하루 3천여건의 상담문의가 들어오는데 그 가운데 40%가 '무(無) 고장' 케이스다. 미국.일본 등 선진국은 그 비율이 10% 안팎이다. 소비자가 기본을 다한다면 그만큼 국제경쟁력도 높아지지 않겠는가.
* 관련기사 : 제품설명서 이렇게
큰 돈을 들여 만든 제품 사용설명서가 유명무실한 것은 소비자와 기업 모두에 책임이 있다.
우선 소비자들은 제품 구입 직후 설명서를 책장이나 제품 박스 안에 내팽개쳐선 안된다.
전자제품 등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설명서를 꼼꼼하게 읽고 관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기업들도 소비자 마인드로 읽기 쉬운 설명서를 만들려는 노력을 게을리해선 안된다.
가급적 전문용어를 피하고 쉽게 풀어써 예컨대 중학생 정도면 누구나 해독이 가능토록
한다든지, 희미하고 깨알만한 글씨를 또렷한 활자로 바꾸는 게 좋다.
만화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쓰는 것도 고려해 봄직하다.
녹색시민단체가 '제품 사용설명서를 소비자 가이드로!' 를 주제로 벌이고 있는 캠페인에 적극
동참하는 것도 권장할 수 있다. 소비자와 기업이 함께 관심을 가져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 중앙일보 2001/ 01/ 08 장영승 LG전자 고객서비스 경영기획팀 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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